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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플러스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칼레의 시민 / 임헌영
게오르크 카이저의 전 3막 희곡 <<칼레의 시민들>>이나, 로댕의 청동조각 <칼레의 시민>으
로 유명한 칼레는 인구 8만 명 안팎인 자그마한 포구다. 바다 건너 영국 도버까지 불과 34
킬로미터인 관문이라 드나드는 손님이 많으면 탐내는 눈길이 늘어나는 세상 이치대로 기
구한 운명의 여인 같은 항구였다.
영국 왕 리차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 때(1190년) 이곳을 거쳤고, 에드워드 3세는 아예
점령(1347년), 프랑스가 되찾은 건 1558년이었으나, 이내 스페인에게 2년 간 빼앗겼으며(1
590년대 중반), 1944년에는 독일의 영국 공격 전초기지였다.
외세에 짓밟힌 능욕 가운데 가장 큰 수난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 - 1453) 때였
다. 1년 가까운 처절한 결사항쟁 뒤여서 에드워드 3세는 보복심이 발동하여 전 시민 학살
을 고집하다가 측근의 권고로 지도급 원로 6명을 골라 교수형에 처하기로 했다. 시민 다수
가 죽느냐, 원로인사 6명을 선발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느냐는 위기 속에서 견해는 제각각이
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오늘의 한국 현실로 그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과연 평소의 애국자
연하는 저명인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일제 침략 앞에서 당시의 지도급 인사들이 어떻
게 처신했던가. 우국충정의 목청이 높았을수록 오히려 매국노로 전락해버린 예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언제나 그랬다. 애국 애족을 빙자하여 결사항전을 외치면서 뒤로는 재산과 자식들을 미국
이나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무리도 있을 터이고, 차라리 시민 전체가 함께 죽어버리자는 공
멸론을 주장하는 사이비 용사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라고 다를 건 없다. 근위대장 뒤게 스끄랭은 인질 반대론을 폈다. 그런데 최고 갑부
였던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고 나서자 뒤
이어 6명이 자진해 총 7명이 되었다. 적어도 안 되지만 많아도 탈이다.
유스타슈는 제비뽑기로 1명을 제외키로 했다가 사정상 이튿날 동틀 무렵 장터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정하기로 굳혔다. 혹 밤새 마음이 변해 늑장을 부리는 1명을 제외하면 된다는 묘
책으로 보이지만 2명 이상이 포기해버리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그런데 정작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건 주동자인 유스타슈 혼자였다. 이쯤 하면 아, 역
사란 항상 그래, 꼭 앞장 선 놈 중에 배신자가 있노라고 흥분할 수 있겠으나 조금만 참으시
라. 모두들 실망과 오해로 술렁일 때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운명의 여섯 시민대표는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 맨머리에 홑옷만을 걸친 채 교수대 앞에
서 대기 중인 에드워드 3세를 향해 걷는다. 이 유명한 장면이 로댕의 작품인데, 마침 임신
중이었던 왕비의 탄원으로 사형을 면했다는 익히 아는 바와 같은 행복한 결말이다.
이 상식적인 진부한 이야기에서 정작 주목하고 싶은 건 로댕의 명작이다.
웬만한 도시에는 상징물로 근엄하고 비장한 애국적인 조각품이 한 둘씩 있기 마련이다. 광
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비롯한 여러 인물상들이 엄숙주의로 일관하고 있음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겠다. 하물며 칼레의 여섯 시민들이야말로 얼마나 비장한 애국투사의 모습일
까 지레 짐작하기 십상이다.
애초에 칼레 시청은 이들을 영웅적인 애국자요 용감무쌍한 투쟁적인 자세로 만들어 높다
란 받침대 위에다 근사하게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로댕이 창조한 여섯 시민들은 너무
나 초라하고 무기력하며 절망에 빠진 모습들이었다. 정작 이웃들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겠다고 나섰으나 막상 제비뽑기를 하려니 행여나 하는 요행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싶은 본능적인 생명욕이 발동하게 된 것이다. 보무도 당당하게 사형장으로 걷기보다는 차
라리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나약한 한 지아비의 초라한 자세가 오히려 더 진솔한 그들
의 참모습이 아닐까.
천재 로댕은 보통사람들의 생명 욕구의 위기의식과 그 참담함을 부각시켜 너무나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어버려 크게 실망시켰다. 로댕의 의도대로 보통사람들 6명이 곧 맞게 될 죽
음의 공포에서 암담한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받침대도 없이 맨발로 선 채 전시
된 것은 1924년이었다.
칼레의 여섯 시민이 부유층이었기에 흔히들 노블리스 오블리제(상류층의 도덕적 미덕)로
풀이하지만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보통사람들의 시민적인 자발성이라는 게 더 옳을 것이
며,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자 로댕은 그들을 큰 소리 치는 허풍장이가 아닌 나약한 보통사
람들의 모습으로 부각했을 것이다.
위기에서 도시와 국가와 민족을 구한 것은 권력의 측근에서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이 아닌
보통 시민들이었음은 특히 우리 근현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항일 의병투쟁 가담자,
민족해방 투쟁에 참여했던 선열들, 4.19와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시위
등등은 보통사람이 만든 역사의 재창조였다. IMF 때 금 모으기에 동참했던 긴 행렬, 월드
컵의 붉은 악마들도 보통사람들의 참여가 만든 장관이었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
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국회에서 야당의 극력 반대로 깎였을 때 1년 목표액을 불과 2주
만에 모아준 것도 보통시민들이었다.
우리의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의 밑거름으로 거듭나는 전환기를 맞고 있는데, 그건 전적
으로 보통사람들의 자발성이 일궈낸 꽃이요 열매에 다름 아니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도시
나 마을들도 뛰어난 영웅적인 인간상에 못지않게 보통 사람들, <칼레의 시민>같은 조각상
이 광장에 들어설 때가 되었다.
초라하고 야윈 보통사람들이 돌 반지를 아까운 듯이 만지작거리면서 서있는 긴 행렬의 조
각, 붉은 악마들의 신명나는 몸짓들, 이런 모습이 친일파의 근엄한 동상 자리를 박차고 대
신 들어설 때라야 우리의 시민의식은 선진국이 될 것이다.
